깊은 슬픔 Deep Sorrow
2025
박송희
프롤로그
그 여자 이야기를 쓰려 한다. 이름을 은서라 짓는다. 사랑이 불가능하다면 살아서 무엇 하나, 가끔 우는 여자, 언제부턴가 내 속에서 내가 먹이를 주어 기른 여자.
처음에 그 여자, 한낱 실루엣에 지나지 않았다. 초봄이었거나 시월의 빗속에서 어렴풋이 잠깐 내 곁을 스쳐 지나가는 줄 알았는데, 차츰 그 여자, 내 마음에 옹이져왔다.
......
사랑은, 사랑은 불가항력이라고 여기는 여자. (불가항력이란 얼마나 불가항력적이란 말인가. 인간의 힘으로는 어찌 할 수 없는 일이라니, 사회통념으로는 방지할 수 없는 힘이라니, 정치도 권력도 끼어들 수 없다니, 그저 심금을 울리는 그 아름다운 자유.)
......
그 여자로 하여금 존재하기를 체념하지 않게 했던 그 사랑의 힘, 그 힘을 글로 쓴다는 건 그 힘을 아무것도 아니게 만들려는 행위인지도 모른다.
......
그 여자, 사랑의 등만 봤던 여자, 어쩌면 삶 바깥의 여자, 저런, 사로잡힌 여자. 가끔, 그 여자, 내 안에서 바느질을 한다.
그 여자가 바느질하는 옆에서 나, 그 여자의 순해서 슬픈 목덜미를......그래. 목덜미 이야기를 하자. 나는 가끔 사람의 목덜미에서 그 사람의 앞날을 느낀다.
존재를 견딘다는 건 시간을 견딘다는 게 아닌지, 존재는 어느만큼 운명적이 아닌지, 국가나 부모를 선택해서 나는 것도 아니고, 어떻게 살고자 한다고 그렇게 살아지는 것도 아닌 존재를 그 여자 살면서 견디기를 바랬지만, 내가 기른 그 여자, 어느 날 블라우스 단추를 다느라고 바느질을 할 때 보았다. 그 여자의 목덜미, 흰 피부로 흐르는, 그 여자, 자신도 거역할 수 없는, 지독한 파멸의 내면을.
......
그 여자, 불가항력에 생에를 걸지만 않았다면, 차가움과 다정함을 조금만 섞을 줄 알았다면, 새로 돋은 자리로 옮겨갈 수 있었을 것을.
하지만 그 여자, 이미 가지고 태어난 목선의 슬픔을 비껴갈 수가 없는가 보았다.
......
그 여자 이야기를 쓰다 울고 싶어지면, 저, 불가능의 흐름 속으로 그 여자마저 사라져버릴 것 같으면, 나, 그 여자가 읽었던 것과 내가 읽었던, 두 편의 시를 생각하리. 모든 것이 다 지나간다. 느낄 때도. 그러면 조금 마음이 나아지리. 지금 생생한 죄, 조금은 추억으로 들어가 이 삶 속에서 덜어지리.
어쨌으면 벼랑에서 만나자, 라고밖에 할 수 없었는지, 벼랑에서, 노루피를 짜서 입에 부어 넣어주겠다고 할 수밖에. 나, 아직 추억으로 보낼 수 없는 마음의 죄 있어, 그 사람 어디선가 나, 태어나지 말았기를, 바라는 건 아닌지.
신경숙 <깊은 슬픔> 프롤로그 중